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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할리우드 영화 특집

내 영화를 내 영화라 부르지 못했던 할리우드 영화인들의 5가지 웃픈 이유

본명 대신 가명을 흔하게 사용하는 배우들과는 달리 영화 감독들이나 시나리오 작가들의 경우 아주 큰 예외가 아닌 이상 거의 본명으로 활동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본명이 '앨런 스튜어트 코니그즈버그'라서 어쩔 수 없이 가명을 사용해야 했던 우디 앨런 감독 정도가 예외일 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연출작 영화에서 자신의 본명을 숨기거나 버리고 가명을 사용해서 엔딩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려야 했던 일들이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들이나 작가들에게서 심심찮게 발생했고, 심지어 한 시나리오 작가는 가명으로 쓴 작품이 두 차례나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에 선정되었지만 결코 정체를 밝힐 수 없었던 일도 있었다는데요.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함께 보실게요. 



 1  세르지오 레오네, 엔니오 모리꼬네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영화 용어가 있습니다. 기존의 정형화된 미국 서부 영화의 틀을 깬 1960년대 이탈리아 서부 영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탈리아 대표 음식인 스파게티를 빌어다 붙인 표현이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장편 데뷔작으로도 유명한 1967년 영화 '황야의 무법자'의 미국 개봉 당시 연출을 맡았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음악 담당이었던 엔니오 모리꼬네는 각각 밥 로버트슨과 댄 사비오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고 합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탈리아 사람이 무슨 서부극을 만든다는 것이냐는 미국인들의 편견을 피해가기 위해서였죠. 


▲ 포스터에도 선명한 '감독 밥 로버트슨' (왼쪽)


대단히 신중한 접근으로 조심스레 다가 섰던 미국 시장에서의 '황야의 무법자'의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서부극이라는 장르를 파괴하는 참신함과 극도의 잔인한 표현 방식 등이 미국인들을 강타했고, '황야의 무법자' 이후 스파게티 웨스턴은 미국 서부 영화의 큰 줄기로 자리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에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 엔니오 모리꼬네는 다음 작품인 '석양의 무법자'부터는 본명을 되찾을 수 있었고, 할리우드 영화사의 이 전설의 콤비는 이후 '옛날 옛적 서부에서', '석양의 갱들', 그리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까지 숱한 걸작들을 숱하게 만들어내게 됩니다.



 2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조엘 코엔과 에단 코엔 형제는 할리우드 형제 감독의 선두 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인 조엘 코엔이 연출을 맡고, 동생 코엔이 제작에 집중하며, 보통 각본은 두 사람이 함께 머리를 맞대는 공동작업 이들의 영화였습니다.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 데뷔작이었던 '블러드 심플'에서부터 '밀러스 크로싱', '바톤 핑크', '파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까지 줄곧 그런 협업을 유지했답니다.


하지만 코엔 형제가 처음 할리우드에 발을 내디덨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같은 이름이 크레디트에 반복이 되면 좀 없어보이는 것도 있고, 실제로 엔딩 크레디트가 산만해지는 점 또한 없지 않았기에, 코엔 형제는 감독, 각본은 그대로 가고 그나마 주목을 덜 받는 편집 부문에 로드릭 제인스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로 합의를 봅니다. 



하지만 코엔 형제의 의도대로 편집 부문이 주목을 덜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화 '파고'로 코엔 형제가 각본상을 수상했던 지난 1997년 제6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그리고 그야말로 이 형제 감독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모든 시상식을 휩쓸었던 2008년 제80회 아카데미상 시상식까지 로드릭 제인스는 두 차례에 걸쳐 편집상 부문에 노미네이션 되었으니까요. 


▲ 아카데미상에 두 차례나 후보에 오른 로드릭 제인스



 3  스티븐 소더버그

다재다능한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는 연출 이외에도 종종 각본도 직접 쓰고 어떨 때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본인 영화의 촬영을 도맡기도 합니다. 그 결과 지난 2000년 개봉했던 영화 '트래픽' 엔딩 크레디트에는 '촬영 및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로 표시가 되었어야 했지만, 미국 작가 조합 약관이 문제가 됩니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크레디트 결정에 대한 재량권은 제작자에게 없으며, 미국 작가조합 크레디트 결정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부분으로, 이 약관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를 포함해서, 감독, 촬영 등을 행한 모든 영화인들이 개별 항목으로 크레디트에 명시가 되어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저분하게 자신의 이름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편집증적으로 싫었던 스티븐 소더버그는 미국 작가 조합에 대한 반발심리로 촬영에 피터 앤드류스라는 가명을 사용합니다. (아버지의 이름과 미들 네임을 조합한 명칭이라고 하네요.) 


거기에 재미를 붙였는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그 이후에도 감독 이외의 분야에는 종종 가명을 사용했는데요. 예를 들어 2002년 영화 '솔라리스' 때는 편집에 어머니의 결혼 전 이름인 매리 앤 버나드를 사용했고, 각본에는 샘 로리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반항기 많은 감독이에요.



 4  달톤 트럼보

이번에는 감독이 아닌 시나리오 작가입니다. 지난 2015년 제이 로치 연출에 브라이언 크랜스톤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던 '트럼보'의 실제 주인공인 시나리오 작가 달톤 트럼보입니다. 이 얘기는 너무도 전설적이어서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네요.


할리우드 영화사의 골든 에이지였던 지난 1940년대에 천재적인 시나리오 집필 능력으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던 작가 달톤 트럼보는 1947년 할리우드 내의 공산주의자를 색출해내겠다는 매카시즘 광풍에 휘말려 일년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가장의 투옥에 집세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가족들의 생활고가 심해지자 달톤 트럼보는 감옥에서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하는데요.


그로부터 일 년 후 감옥에서 나온 달톤 트럼보는 옥중에서 창작한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갔지만 번번히 퇴짜를 맞게 됩니다. 공산주의 활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과는 절대 일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기 때문이죠. 



이에 달톤 트럼보는 자신의 친한 친구 작가인 이안 맥켈런 헌터를 찾아 가서 자신은 블랙리스트로 낙인이 찍혀 영화화가 힘드니 친구의 이름을 빌리고자 한다며 간청을 했고, 이안 맥켈런 헌터는 자신의 이름으로 달톤 트롬보의 시나리오를 영화사에 팔았고, 그렇게 영화화된 달톤 트럼보의 시나리오는 1954년 제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달톤 트럼보는 친구 이안 맥켈런 헌터가 오스카 트로피를 받은 모습을 TV로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달톤 트롬보는 수 십여개의 가명을 사용해서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되는데, 당시 달톤 트럼보가 집필한 각본 중에는 로버트 리치라는 가명으로 1957년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을 수상한 '브레이브 원' 이외에도, '스파르타쿠스', '엑소더스', '빠삐용'과 같은 걸작들이 다수였습니다. 모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던 작품들이죠.


하지만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지난 1993년 아카데미 위원회가 과거 달톤 트럼보의 친구 이안 맥켈런 헌터에게 수여되었던 아카데미 각본상의 실제 작가가 달톤 트럼보였다는 사실을 공표하며, 달톤 트럼보 사후 17년 후 아카데미 각본상을 제 주인에게 다시 수여하게 됩니다. 


오래 전에 사망한 달톤 트럼보를 대신해서 손녀딸이 트로피를 받아들었던 지난 1957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각본상 수상 작품, 달톤 트롬보가 옥중에서 가족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썼다는 바로 그 영화는 무려 '로마의 휴일'이었습니다. 40년 만에 두 번째 아카데미 각본상을 무덤에서 받은 달톤 트럼보의 전설적인 이야기죠.


▲ 가명으로 두 차례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던 천재 작가 달톤 트럼보



 5  앨런 스미시

'앨런 스미시'는 본명이 아닌 가명입니다. 그것도 미국 감독 협회에서 자신의 본명을 엔딩 크레디트에 남기기를 원하지 않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공용 가명으로, 통상적으로 자신의 연출작이 제작 과정에서 온갖 불협화음과 갈등으로 쓰레기같은 결과물로 나왔을 때, 깨끗한 커리어 유지를 위해 본명 대신 '앨런 스미시'를 감독 이름으로 사용하곤 합니다. 


대표적으로 1984년 '사구'가 확장판으로 출시됐을 때 데이빗 린치 감독이 본인 이름 대신 앨런 스미시를 사용했고, 마이클 만 감독 역시 '히트'를 TV 영화 버전으로 재편집한 버전에서 앨런 스미시를 선택했으며, 그 외에도 데니스 호퍼가 온갖 악평에 시달렸던 1990년 연출작 '뒤로 가는 남과 여'에, 미드 '24시'로 유명한 배우 키퍼 서덜랜드가 자신의 두 번째 감독 연출작인 '우먼 원티드'에, 마틴 브레스트 감독이 '여인의 향기'의 항공기 기내 영화 편집본에 앨런 스미시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앨런 스미시 (Alan Smithee)'라는 명칭의 유래로는 '정체 불명의 사나이 (the alias men)'이라는 말의 단어 순서를 바꿔 조합한 애너그램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출처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난 1968년부터 광범위하게 사용되어온 '앨런 스미시'가 남용되며, 할리우드 영화 역사상 가장 많은 작품 활동을 기록한 감독이자 역대 최악의 할리우드 감독으로 앨런 스미시를 뛰어 넘을 인물이 없게 되자, 결국 미국 감독 협회는 지난 2000년부터 앨런 스미시 정책을 폐기하게 됩니다.